제목: 친구들의 하나님, 욥의 하나님
본문: 욥기 12:1~25
오늘 본문에서 욥은 친구들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게다가 친구들이 주장하는 바는 짐승들 조차 아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소발이 11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했기에 욥도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발이 신학적 관점을 들고 나왔기에 욥도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들고 나오는 것 처럼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욥의 하나님은 친구들의 하나님과 사뭇 다릅니다. 비슷한 얘기 같은데 가만히 보면 다릅니다.
친구들의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하나님은 죄인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사도, 왕들도, 제사장들도, 충성된 자도, 귀인들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도 일하시고 (22), 사람을 어둠 가운데 밀어넣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25)
소발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겠는가" (11:7) 라고 했지만, 실재로 하나님의 오묘함을 측량하고 있지 못했던 것은 소발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가 있으면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 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함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릅니다.
어쩌면 욥은 그 큰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침묵(Silence)라는 영화 줄거리 영상을 봤습니다. 이는 일본 기독교 박해 역사를 그린 영화 및 소설입니다.
영화는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행해졌던 고문의 참흑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신앙을 부인하는 신부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 핍박 가운데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야지, 부인하면 변절자고 신앙을 저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영화의 처참한 박해 장면들을 보면 그 말이 쏙 들어갑니다.
소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기리시단 박해 시대에 행해진 고문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그것을 체험한 사람의 신앙이 깊다느니 얕다느니 말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있는가?” - 엔도 슈사쿠,《침묵의 소리》
좀 전에 한 분과 약 1시간 동안 전화로 신학적인 토론을 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의 건강한 주장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 글을 쓰며 다시금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오묘함과 크심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알 수 없습니다.
'묵상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짓부수는 말, 살리는 말 (욥기 19:1~6) (0) | 2024.04.30 |
---|---|
손을 잡아줄 자 (욥기 17:1~16) (0) | 2024.04.30 |
왜 나를 태어나게 했어요? (욥기 10:1~22) (0) | 2024.04.30 |
우리의 질문, 하나님의 답변 (욥기 9:25~35) (1) | 2024.04.30 |
신앙이 공식화가 가져온 오류 (욥기 5:1~27) (0) | 2024.04.30 |